나는 기독교계에 있는 동안 사탄, 마귀, 귀신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들었다. 한 번도 그것들을 본 적이 없지만 마음에 어떤
두려움이 생기면 그것이 사탄의 작용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두려움이 왜 생기는 걸까? 정말 사탄이 두려움을 주었기 때문인가? 그
사탄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격적인 존재라고 말한다. 그런데 늘 비밀 속에 담겨 있었다.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으니 그 실체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짐작하고 추측하고 억측할 뿐이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에는 사탄, 마귀
같은 존재는 없었다. 순수 토종으로 처녀귀신, 몽달귀신, 도깨비 같은 귀엽기도 한 악(?)의 존재가 전례되었다. 그러다가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사탄, 마귀 같은 서양의 악한 존재도 수입되었다. 어떤 것에 대한 개념과 이름이 없으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이름을 갖는 순간 마치 실체가 있는 것처럼 나타난다. 기독교적 악의 존재들도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그것들이
실재할까? 인간처럼 생각하고 계획하고 힘과 능력을 펼치며 보이지 않게 이 세상을 조정하고 있는 것일까? 기독교인들은 그렇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나는 그런 존재들은 없다고 생각한다.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은 완벽하게 검증하지 못한
부분이 있어서 그 말은 보류 상태이다. 하지만 없는 것이 더 정확하다. 악의 존재들은 생각하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는다. 실험도 해
봤고, 논리적으로도 그러하고, 진리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한층 더 명확해진다. 모두 마음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인간이 그려내는 환영 같은 것들이다. 존재하지 않는데 이름을 부여하고 설명하고 어떤 현상들과 관련시키니, 마치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것들 모두 지우고 있는 그대로 지켜보면 아무것도 없다. 모두 마음이 그려내는 환상이다.
어떤
에너지 작용은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눈에 보이는 물질과 눈에 보이지 않는 물질이 있는데 모두 에너지를 발산한다. 그
에너지에 의한 힘의 대립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일상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늘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영적 힘의 움직임이 아니다. 그냥 자연계의 순환이다. 그것을 마치 어떤 존재의 영향력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오판하는 것이다.
어떤 때 무겁고 음침한 느낌이 든다면 그것은 악의 존재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런 에너지가 발산되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에너지를
받으면 기가 약한 사람은 무서운 상상을 하든가 이상한 현상을 경험할 수도 있다. 에너지 작용에 의한 마음의 현상인 것이다.
그러니 두려워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적절히 대처하면 해결된다.
하나의 일화가 생각난다.
카이스트 내에 오리연못이란 곳이 있다. 그곳에 오리와 거위들이 즐겨 논다고 하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옆에 작은 산이 있는데
'어은동산'인 것으로 안다. 작은 산책로가 북쪽 야외강당까지 숲으로 이어져 있다. 걸어서 올라가면 약 15분 정도 소요되는
듯했다.
(사진 : 오른쪽 아래에서 음침한 지점을 지나서 왼쪽 위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카이스트를 자주 찾다보니 오래 전부터 그곳 산책길을 걸을 때가 있었다. 그 길은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아서 조용하면서 나무들로 둘러쌓여 음침한 느낌을 발산했다. 햇볕도 거의 들지 않고
무척 습했다. 여름에는 모기들 천지여서 단 몇 초라도 움직이지 않고 있으면 여러 군데 물려 버린다. 혼자서 그곳을 지나가는데
어떤 날은 기분이 평화로와서 즐겁고 상쾌하게 숲길을 지나간다. 그런데 늘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어떤 날은 기분 좋게 숲에
들어갔다가 너무 음침해서 기분이 싸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는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해 온다. 그게 너무 갑작스럽고 무겁게
느껴져서 정말 귀신이 덥쳐올 것 같은 두려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내 건강이 좋지 못할 때에는 기가 약해서 그 두려움을 견디지
못했다. 그럴 때에는 얼른 자리를 떠서 숲을 빠져 나온다. 몇 번 경험하니 그 실체가 궁금해질 때도 있었다. 한번은 두려움이
찾아왔을 때 내 마음을 관찰해 보았다. 정말 악한 존재가 있어서 내가 두려워하는지, 아니면 마음이 두려움을 발산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생각을 죽여버렸다. 마음을 텅 비우고 있는 그대로를 느껴 보았다. 보이는 것은 보이는 그대로, 들리는 것은
들리는 그대로, 단 생각만은 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불안했던 마음이 금새 밝아졌다. 산새 소리가 들리고, 멀리서 차 소리가 들리고, 내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바람소리도 들리고, 그늘진 나무들이 쭉쭉 뻗어 있고, 길이 꼬불꼬불 내 앞에 놓여 있었다. 공포는 사리지고 안 느껴졌다. 그 뒤로
그 숲을 찾더라도 별로 힘들어 하지 않았다. 본래 음기가 강한 지대라서 내 몸 상태에 따라 두려움이 생겼다가 즐거웠다가 하는
거였다. 즉 그 숲의 에너지가 내 몸의 에너지와 합쳐졌을 때 그 에너지 파동이 나와 맞지 않아서 내가 힘들었던 것인데 마음이
두려움을 느끼고 상상을 하니 그 공포가 실재하는 어떤 것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도 좋지 않은 경험 때문인지 잘 찾지는 않는다.
아래
사진이 바로 그 장소이다. 실제로는 사진의 화면보다 더 어둡다. 올해 5월 아침에 운동삼아 카이스트에 갔다가 그곳을 한번 찾았는데, 들어가서
노천강단까지 갔을 때에는 마음이 평화로웠다.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옛날에 두려워했던 기억이 나면서 마음에 공포감이 몰려왔다.
똑같은 곳을 지나가는데 갈 때와 올 때의 느낌이 달랐다. 전날 잠을 잘 못자서 몸이 피곤했었는데 마침 그때 기가 약했던 것과 옛날
두려웠던 기억이 겹치면서 공포가 나를 압도 했다. 그날은 얼른 숲을 빠져 나왔다. 산에 가면 꼭 그런 곳이 있다. 그 지점에 귀신이 살아서가 아니라 그 지점의 에너지가 내 심신의 에너지와 만났을 때 유쾌하지 못한 파동이 만들어져서 그런 것이다. 그때
마음에서 불필요하게 두려운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또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약 5년 전에 자연의 소리를 수집했던 때가 있었다. 그 때 계룡산 자락인 수통골에서 새소리와 계곡
물소리를 수집했는데, 낮에는 사람들 소리 때문에 제대로 녹음을 할 수 없었다. 4월 어느 날 나는 큰 마음을 먹고 한 밤중에
계곡을 찾기로 했다. 그런데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캄캄한 밤 자정에 나 혼자 계곡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과연 그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까 였다. 특히나 내가 녹음하려는 지점은 양쪽에 깍아지른 암벽으로 둘러쌓여 있어서 음기가 보통 강한 곳이 아니었다.
낮에도 혼자 지나가면 두리번거리며 걸어야 할 정도였다. 많은 고민을 한 끝에 더는 미룰 수 없어서 수통골 가는 102번 마지막 차를 타고 수통골에 갔다. 종점에 내려서 이십 분 정도 걸어서 수통골 입구까지 갔다. 국립공원 사무소 건물이 보이고 그 뒤로는 암흑 세계였다.
나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생각이 많은 스타일이었다. 그러니 산속 으스스한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서 분명 공포가 찾아올 것이었다. 특히나 계룡산은
암반으로 된 산이라 기운이 강해서 담력이 약한 사람은 견디기 힘든 곳이기도 하다. 그런 곳을 한밤중에 들어가야
하니 사즉생(死則生) 각오로 들어가야 했다. 가장 무서웠던 것은 귀신이 나타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었다. 물론 귀신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혹시나 사람들의 말이 맞아서 정말 나타나면 어쩌나 하는 상상도 했다. 아니면 내 마음이 공포를 견디지 못해서 온갖 망상을
하다가 헛 것을 보고 놀래서 기절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모두 마음이 만들어 낸다는 것을 알았기에
한 가지 전략을 세웠다. 산을 들어갈 때부터 녹음을 마치고 나올 때까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생각이야 자연발생적인 것이어서 저절로 나타난다. 나는 생각이 나타나려하면 의도적으로 그것을 차단하고 정신을 차렸다.
자전거
라이딩을 할 때 사용했던 작은 후래시를 머리에 쓰고 관리소 입구를 지나 걸어 들어갔다. 길 옆 물소리와 내 발자국 소리 외에는
정말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길도 눈앞 2~3미터 정도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뒤로는 완전 암흑이었다. 본격적으로 계곡에
들어섰을 때에는 길도 고르지 못해서 걷는데 힘이 들었다. 마침 그날은 달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걸음 한걸음 내가 목적한 장소까지 더듬더듬 찾아갔다. 도착지점에 이르자 나는 가방에서 녹음기를 꺼내어 설치를 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쪼그려 앉아서 주변을 살폈다. 어둠 위로 밤하늘이 보였다. 양 옆으로 시커먼 나무들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때 분위기는
어떠 했을까? 정말 고요했다. 새들도 전혀 움직임이 없었고, 다른 동물들도 기척이 없었다. 오직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만 들렸고, 주변은 정적 그 자체였다. 태어나서 그렇게 고요한 공간은 처음이었다. 그때 내가 많이 무서웠을까? 아니었다. 마음에
생각을 완전히 잠재운 상태여서 공포가 하나도 없었다. 그냥 정신만 깨어 있어서 주변을 경계하며 시간이 흘러가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의외의 복병이 있었다. 한 시간 녹음해야 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추워지기 시작하더니, 30분 지날 무렵 저체온증이 찾아왔다. 4월 한 밤의 산속 온도를 예측하지 못하고
낮에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와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정말 저체온증으로 사고가 날 것 같았다. 얼른 짐을 챙겨서 왔던 길로 되돌아 갔다. 계곡을 빠져 나오고 사무소 건물 앞까지 왔을 때 비로소 긴장이 풀리면서 한 숨이 길게 새어 나왔다. 정말 그 시간 동안 내
마음 속에서는 어떠한 무서한 생각도 차단하고 의식만 깨어서 약 2시간 정도 산에서 보냈다.
그날의 경험은 내
인생에서 큰 가르침을 남겼다. 사악한 존재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고, 결국 그 모든 것들은 마음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란 것을
실감했었다. 내가 모든 걸 다 경험할 수는 없지만, 그 동안의 몇몇 경험과 지식, 그리고 요즘 진리를 만나는 과정에서 많은
지혜를 얻고 있는데, 그런 통합적인 것을 바탕으로 인격을 가진 나쁜 존재란 본래 없는 것이 맞다는 게 내 결론이다.
어떤 이는 사탄이 보이지 않게 이 세상과 많은 인간 조직들 그리고 사람들을 뒤에서 조종한다고 말하는데, 그건 사탄이 아니라 인간 자체의 여러 작용에 의한 것들이다. 그러니 그런 말들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
계곡을 옆으로 지나서 아래 사진의 위치에 와서 녹음을 했었다. 오른쪽에 녹음기를 설치하고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었다. 계곡 양 옆으로 깍아지른 암벽과 나무들이 있다. 참고용인 이 사진들은 겨울 사진인데, 5월만 되어도 이곳은 정말 아름답다.
이 질문이 맞는 질문일까? '누구'라는 물음은 사람에게 쓰는 말이다. 나무에게 '너는 누구니?'라고 하지 않는다. 저 질문은 하나님은 인격적인 존재이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저것이 전부인 양 취급하는 것이 문제이다. 예를들어서 어떤 것에 a, b, c ... 등의 속성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유독 a 속성에 대해서만 강조를 한다면 맞는 걸까? 틀리지 않았지만 맞지도 않다. 그냥 a의 속성도 있다는 정도가 맞을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다. 그 모든 것 속에서 인격적이라는 하나의 속성만을 걸러내서 강조할 필요가 없다. 그것만을 걸러낼 경우 그것은 완전성을 손상시키고 왜곡시킨다. 그런 이유로 '하나님은 인격적인 존재이다'라고 하는 순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만 부각시키는 부자연스러운 일이 발생한다. 모든 존재는 하나님과 관계가 있다. 하나가 부각되면 다른 것들은 묻혀버린다. 그것은 옳은 시각이 아니다. 전체를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