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천의 물오리들)
늦은 오후 갑천을 걸었다. 갑자기 나타난 나를 보더니 물오리들이 화들짝 놀랐다. 그들은 눈을 말똥말똥 뜨고서 경계했다. 한마리가 급하게 물살을 가르며 건너편으로 이동했다. 나는 가던 길로 계속 걸었다.
표현상 내가 있고 물오리들이 있다고 쓴다. 여기서 나라고 하는 것은 물오리를 바라보는 몸(눈)이 그것이다. 몸과 저만치 떨어져 있으니 물오리들은 몸이 바라보는 어떤 대상이다. 여기서는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어 있다. 이런 생각은 말 그대로 관념이다.
오늘 내가 경험된 실제는 이러하다. 발바닥이 지면에 닿는 느낌이 계속 느껴졌다. 풍경이 계속 바뀌더니 갑천에 이르렀고 물오리들이 화들짝 놀라는 모습이 나타났다. 갑천의 물은 고요히 흐르고 한 마리 물오리에 의해서 물쌀이 갈라져 나타났다. 발의 감촉은 계속 느껴지면서 갑천 하류 방향으로 풍경이 계속 지나가고 있었다.
여기에는 보는 내(몸/눈)가 없다. 물오리를 묘사하긴 했지만 보여지는 물오리도 없다. 그냥 사진의 풍경이 의식 안에서 펼쳐졌다. 느낌이 나타났고 갑천의 풍경이 나타났다. 풍경은 발바닥 느낌의 변화와 함께 계속 바뀌어 갔다. 풍경을 보는 나는 없고 단지 알아차림만 있었다. 생각도 중간중간 나타났지만 내가 생각한다는 느낌이 없었다. 그냥 생각이라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나타나서 조금 시끄럽게 하더니 사라졌다. 이게 실제로 경험된 오늘 오후였다.
어제에 비해서 오늘 자의식이 많이 줄어든 느낌이다. 그냥 의식 안에서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고 생각되는 상태였다. 자의식이 강할 때에는 의식이 대상과 들러붙어 대상 자체가 곧 나를 대신한다는 느낌이 강한데, 의식이 대상으로부터 멀어져 허공에 둥둥 떠있는 느낌이 드니, 나라는 의식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알아차림, 즉 존재만 있다.
알아차림만 있는 경우 의식에 나타나는 모든 것이 나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아직은 보이는 그 자체를 나 자신이라고 말하려니 몸-생각의 자의식에서 완전히 벗어난 느낌은 들지 않는다. 즉 깔끔하지가 않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자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는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고 생각되는 모든 것이 나와 같다. 즉 나와 대상의 구분이 없어진다. 오늘은 그것을 제대로 경험했다. 단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