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천을 걸으며)
처음 마음공부를 할 때에는 길고 먼 길을 걷을 때 참 힘들었다. 몸이 고단한 건 둘째치고 너무 심심했다. 그러다보니 나도 모르게 온갖 생각에 빠져들거나 노래를 흥얼거렸다. 어떤 날은 이어폰을 꽂고 가요를 들으며 걷기도 했다. 사실 이렇게 하는 건 마음공부를 포기하는 거나 다름없다. 그나마 건강에는 좋으니 그렇게 꾸준히 걸었다.
마음챙김, 즉 알아차림을 하면서 걷는 게 조금 수월해졌다. 깨어있는 동안에는 걷는 게 심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깨어있음이 오래 지속되지 못해서 줄곧 생각에 빠져들곤 했다. 그러다가 아차 싶어 다시 깨어있음 상태가 되고, 또 다시 생각에 빠져들기를 계속 반복했다. 초기의 마음챙김 상태에서는 깨어있는 시간보다 생각에 빠져있는 시간이 더 길었다. 한번 생각에 빠져 있으면 저절로 깨어날 때까지 쭉 생각 속에서 걷게 된다.
알아차림이 좀 더 길어지면서 걷는게 조금씩 재미있어졌다. 눈 앞에 펼쳐지는 풍경에 변화가 느껴졌다. 눈 앞에 나타났다가 시야의 양 옆으로 사라지는 것이 느껴지면서 재미가 있었다. 이때 너무 고개를 두리번거리지 말아야 하는데, 풍경이 너무 요란하게 바뀌면 알아차림이 혼란스러워진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는 지겨움도 덜 하고, 신선한 느낌도 들고, 사물도 또렷하게 보이지만 그 이상을 알지 못한다. 여전히 내가 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단지 정신 바짝 차리고 보고 듣고 하는 것 같은 상태이다. 알아차림은 하고 있지만 아직 의식이 보이고 들리는 대상에게 가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즉 보이고 들리는 것들의 변화만 느껴진다. 이 단계는 그냥 건너 뛸 수 없다. 이 단계를 오래도록 거쳐야 나중에 본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단계에도 본성은 늘 있는데 자각이 되지 못할 뿐이다. 오래 익숙해지면 어느 날 본성이 자각되기 시작한다. 그런데 본성이 자각되기 전까지는 본인도 본성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내가 그랬다 ^^
본성을 한번이라도 맛 본 사람은 그제서야 알아차림이 본성에 의해서 늘 있어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망상을 할 때에도 그것이 본성에 의해서 하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의식이 생각이나 어떤 대상에 맞추어지면 금새 본성이 가려진다. 개체의식으로 의식이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서 알아차림 할 때 현상은 이렇다. 오늘 갑천을 거닐며 두 시간 걷다가 왔다. 잠깐씩 생각이 나거나 주변의 물오리를 볼 때 순간적으로 그것들에 집중하다보니 개체의식이 되다가, 다시 깨어나면 전체의식으로 되돌아오곤 했다. 개체의식으로 사물을 보면 의식이 좁아져서 초점이 가 있는 그것만 의식하게 된다. 전체의식(본성)을 갖게 되면 대상에 대한 초점이 흐릿해진다. 특정 사물에 초점이 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 전체 흐름이 감지된다. 길 끝에 서 있는 나무를 보지만 멀리 양 옆으로 차들이 줄줄이 지나가는 게 다 보이고, 하늘로 물오리가 날아가는 것도 다 느껴진다. 즉 모든 변화가 함께 알아차림 된다. 길 옆 나무를 보고 걷더라도 그 나무의 고정된 모습이 보이는 게 아니라 흐릿하면서 변하는 듯한 형상이 그대로느껴진다. 즉 나무는 그대로 서 있지만 고정된 모습이 아닌, 순간순간 변하고 있는 그 자체가 보인다. 그래서 나무는 더 생동감 있고 살아 있다. 내가 변화 속에 본성이 함께 보인다고 하는 것이 이런 뜻이다. 본성은 순간순간 변화와 함께 그 앎이 드러난다. 나무나 바위처럼 고정된 물체를 보더라도, 본성의 자각으로 보면 그 물체는 제자리에서 변하는 것이 느껴진다. 나무는 바람이 불어서 흔들리는 게 느껴져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바위는 어떠한가? 가만히 있는 바위를 알아차림 하면 그것의 살아서 꿈털거리는 생명 기운이 느껴진다면 믿겠는가? 그 때문인지 오랫동안 바위만 쳐다봐도 지겹지가 않다. 하지만 본성의 자각없이 볼 때는 고정된 물체는 그 물질 자체보다는 마음에 새겨진 그 물질의 이미지를 보기 때문에 변화없는 똑같은 모습으로 보인다. 그래서 지겨움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은 내 경험에서 살펴본 바이다. 다른 이의 경험은 잘 모르겠다.
이렇게 본성이 자각되면서 나타나는 세상은 그 자체가 바로 나 자신이 된다. 의식에 비치는 세상 그대로 나 자신이다. 눈에 보이는 것도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귀에 들리는 것도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생각도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느낌도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모두 의식 안에서 변한다. 다만 그 변화를 흔들림없이 아는 존재만 있다. 그 변함없는 존재가 바로 본성이고 하나님이고 나 자신이다. 그 존재는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냥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외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들은 모두 환영이고 꿈처럼 지나간다. 하지만 그 변하는 것들이 없으면 본성도 드러나지 못한다. 둘은 늘 함께 나타난다. 그러니 의식에서 나타나는 모든 세상은 나 자신인 것이다. 눈이 머무는 것이 바로 지금 그 순간의 나의 표현인 것이다. 귀에 들리는 그것이 그때의 내 목소리인 것이다. 이런 신비한 세상을 그 누가 알았단 말인가? 실제로 경험하지 못하면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