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피해서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저기 보이는 길 끝이 습지길 입구이다)
아침에 일찍 깼지만 몸 상태가 경쾌하지 못했다. 비는 계속 내리고 오전을 그냥 다 보냈다. 밥을 먹고 오후 1시쯤 집을 나섰다. 그냥 가볍게 걷다가 돌아오려 했는데, 그만 나도 모르게 습지길로 향했다. 걷는데 다리가 무거웠다. 힘들면 다시 돌아가면 되니 그냥 한걸음 한걸음 깨어있음 속에서 무작정 걸었다. 마치 순례자가 먼 길을 떠나듯이 그렇게 걸었다.
비가 와서 사람들이 없었다. 습지길 숲에 들어가서 나오기까지 딱 세 명 마주칠 뿐이었다. 너무 한적하고 비 때문에 어둡고 음습해서 처음 가는 사람은 두려워 할 것 같았다. 안전한 곳이란 걸 알기에 나는 사람없는 숲이 너무 좋았다. 오늘은 물오리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회색 왜가리와 백로가 자주 보였다. 신발과 옷이 비에 다 젖었다. 그래도 기분만은 너무 좋았다. 습지길 안쪽까지 가서 오랫동안 떨어지는 빗속에서 깨어있음 명상을 했다. 이상하게도 그곳에서는 알아차림 명상이 너무 잘 되었다. 단풍 든 산과 버들나무와 갈대와 새들을 보았다. 오늘은 빗소리까지 너무 환상적이었다. 내 눈과 귀를 통해서 세상을 보는 하나님을 느꼈다. 느낌없는 느낌이랄까. 보이는데 보는 이는 알 수 없다. 단지 세상이 보이기만 했다. 하지만 보이는 그 의식에서 보는 자의 능력이 느껴졌다. 그 능력자가 드러날 때까지 나는 이 일을 계속 할 것이다.
비가 더 무겁게 내려서야 습지길을 빠져나왔다. 몸은 많이 지쳐 있었다. 오후 5시 쯤 입구로 나왔는데 날도 조금씩 어두워져 갔다. 바로 집으로 향하지 않고 위 사진의 벤치에 앉아서 비를 피했다. 조금 남은 따뜻한 커피를 마져 마시고 갑천 건너편 고층 아파트를 바라 보았다. 비가 더 거세게 내렸다. 잿빛 하늘, 땅바닥을 뚫을 듯한 빗물, 축축하고 끝없이 펼쳐진 둘레길, 두세 마리씩 무리지어 날아가는 물오리들, 안개 …… 그리고 나. 집으로 가기 싫었다. 그냥 계속 앉아서 빗 속에 잠졌다. 단지 눈 앞 풍경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갑천을 따라서 걷는데 가로등 불빛에 반짝이는 단풍잎이 너무 아름다웠다.
충남대학교 앞 연래춘 중국반점에서 짬뽕 하나 먹고 집에 돌아왔다. 따뜻한 샤워물에 씻고 이렇게 글을 남긴다. 몸이 많이 피곤하다. 그리고 행복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