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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여행의 기억
현재를 긴 영화에 비유한다면, 기억과 기대는 거기에서 핵심으로 꼽힐 만한 장면들을 선택한다. 내가 이 섬에 오기까지 9시간 30분이 걸렸는데, 기억은 불과 예닐곱 장의 정적인 이미지만 남녀놓았다. 그나마 그 가운데서 딱 하나만이 오늘보다 긴 목숨을 부여받는다. 기내식이 나오던 장면이다 공항에서 경험한 것들 중에서는 입국 심사대에 줄을 선 이미지에만 접근이 가능했다. 결국 내 겹겹의 경험들은 압축되고 잘 정리된 이야기로 자리를 잡았다. 나는 런던에서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호텔에 투숙한 사람이 된 것이다. - 《여행의 기술》 p.26, 알랭 드 보통 지음 여행을 했는데 기억이 없다면 여행을 한 것일까, 안 한 것일까? 알랭의 《여행의 기술》을 읽으면서 지난 날 내가 여행했던 기억을 되새겨봤다. 특별히 어떤 시점을 지정하지 않고 막연하게 생각하니 강렬하게 남아있는 장면 몇 개가 뒤죽박죽 떠오른다.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 세계의 여러 곳을 여행했는데 모든 곳이 꼼꼼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유럽배낭여행을 갔을 때에는 혼자서 걸어서 다닌 곳이 많아서 그때만은 좀 더 세세하게 기억이 난다. 하지만 패키지 여행을 했던 곳은 드문드문 관광지의 몇 장소만 기억에 남아 있다. 그나마 지금 기억나는 것들도 사진을 찍었기에 여지껏 기억에 남아 있는 경우가 대부분일테다. 사진을 보면서 그때를 반복해서 떠올리니 더 기억에 새겨지는 것이다. 사진마저 찍지 않았다면 여행의 일부라도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어쩌면 사람들은 여행가서 줄기차게 사진찍는 이유는 그것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에서 사라질테고, 사진이라도 찍어두면 자신이 그곳을 다녀왔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여행을 한 경험은 부재하고 여행한 흔적만 남긴다. 앞으로 여행할 일이 반드시 생길 것 같아서 여행책을 계속 사보고 있다. 다른 이들의 여행을 보면서 배우는 것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나만의 여행 기술을 만드는 것이다. 알랭의 책은 그런 의미에서 마음에 쏙 든다. 책도 전문 작가답게 잘 쓴다. 세세한 묘사와 부드러운 연결이 막힘없이 읽혀지고 있다. 책을 잘 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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