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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나간 흔적이 아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말하기 위해서 지난 날의 내 흔적을 들추어낸다면 얼마나 웃기는 일이겠는가? 나는 굳이 과거를 말하지 않아도 지금 이대로 나로서 존재한다.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무슨 학교를 졸업했는지, 어떤 직장에 다니는지, 얼마나 많은 인맥과 닿아 있는지, 얼마나 많은 해외 여행을 했는지, 얼마나 많은 외국어를 말할 수 있는지, 연봉은 얼마나 받는지, 재산은 얼마나 있는지, 스펙은 얼마나 대단한지, 가족 구성원은 어떤 인물인지 말하지 않아도 나는 나로서 존재한다. 내가 누구인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알리기 위해서 내 존재 자체가 아니라 과거의 흔적과 결과물을 들이민다면 그야말로 나는 실체없는 허수아비와 다름없다. 과거의 경험과 실적은 지금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기억과 증명서 같은 종이 쪼가리 몇 개만 날라 다닌다. 그런 것들은 내가 아니며, 나를 대신할 수도 없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세계가 탄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