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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헤아리면 천 걸음 만 걸음을 걷고 있지만, 헤아리지 않으면 언제나 한 걸음일 뿐이다. 헤아리면 이곳과 저곳을 걸어다닌 것이지만, 헤아리지 않으면 언제나 걷고 있을 뿐이다. 

- 《마조어록》p.80, 김태완 편저

위 글은〈마음을 깨달으면 된다〉의 내용에 대한 김태완 선생의 도움말이다. 그런데 이 글이 참 마음에 든다. 깨달음에 관한 글이지만, 내가 길을 걷고 있을 때의 상황이 그대로 느껴져서 옮겨본다.

마음은 늘 지금 이 순간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다. 늘 생각이 비집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생각이 오더라도 깨어 있으면 괜찮다. 하지만 거의 모든 사람은 생각이 나타날 때 생각에 빠져서 문제이다.

지금은 너무 더워서 바깥을 걷지 못하지만, 이전에는 매일 서너 시간씩 길을 걸었다. 건강을 위해서인 것도 있지만 걸으면서 하는 명상이 참 좋았다. 걸으면 도착지가 있지만 걷는 동안에는 그런 것 생각하지 않는다. 오직 눈에 보이는, 귀에 들리는 것에 의식을 집중한다. 매 순간 변하는 풍경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본다. 변하지 않는 것 위에서 변하는 것들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면 정말 모든 게 신선하고 즐겁다. 김태완 선생의 글처럼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지 않고 깨어서 걸으면 단지 걷기만 있다.

세상사 모든 면에서 그러하겠지만, 여행을 할 때에도 자신이 서 있는 그곳이나 걸어서 지나가는 그곳에 집중하지 못하면 참 여행이 될 수 없다. 여행은 과정이다. 물론 시작이 있고 마침이 있는 게 여행이지만, 궁극적으로 여행은 과정이다. 그런데 여행을 하면서 어디를 갈까, 언제 도착할까, 무엇이 필요할까 등을 생각한다면 여행을 하면서도 여행을 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내가 서 있는 곳, 내가 걷는 지금 그곳에 늘 마음이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