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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순례길

잠깐 잠이 들었다가 깼다. 밖은 소란스럽다. 시계를 보니 점심 시간이다. 기분이 가라앉아 있어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준비해서 마시고 있다. 《나는 가야만 한다 -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를 펼쳤다. 이용호 신부님은 레온을 지나서 이제 산티아고까지 며칠 남지 않았다. 이 책은 오늘 다 읽을 것 같다.

나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수 있을까? 지금으로써는 장담하지 못한다. 가장 큰 이유가 건강 문제이다. 몸이 더 나아지지 않고 출발한다면 정말 혹독한 순례길을 경험할 수도 있다. 아직 몇 년 더 시간이 있으니 조급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굳이 산티아고를 갈 필요도 없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것은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가 있을 뿐이다. 그래도 한번은 걸어보고 싶다.

이번달에 산티아고 순례길 책을 다섯 권 연속으로 읽고 있다.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도 대기 중이다. 갑자기 산티아고 순례길에 꽂혀서 알라딘 중고서점을 이용해 관련 서적이 보이는 즉시 구입을 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아니더라도 다른 여행책도 몇 권 구입했다. 걷기 관련된 책인《걷기 예찬》과 《걷는 사람, 하정우》도 있다. 내 옆에서 지금 대기 중이다. 《걷기 예찬》은 이미 읽기 시작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고행이다. 하루이틀 걷는 것도 아니고 한달 넘게 800km를 배낭을 메고 걷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길을 걷다보면 온갖 생각이 찾아올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경치에 매료될 수도 있지만, 때로는 한없이 늘어진 길에 지쳐서 맨붕이 올 지도 모른다. 몸은 나날이 지쳐가고, 발은 물집에 혹사 당하고, 잠자리 마저 베드버거에 물려서 고통스럽다. 그런 여행길이 단지 거룩한 순례길이 될거라는 생각은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거의 모든 여행자는 단지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그 날만을 고대하며 참고 참으며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 산티아고가 목적지이다. 그들은 도달해야 할 곳이 있는 것이다.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해냈다는 기쁨과 성취감이 가슴 속에서 솟아 오를 것이다. 그 만족감은 한 동안 지속될 것이다.

하지만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면 그 만족감은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할 것이다. 집에 돌아와서 일상에 복귀하면 언제 그랬냐는듯이 먼 기억속의 산티아고 순례길이 될 것이다. 그러면 사진이나 동영상 또는 그때의 일기를 들춰내며 그날의 힘든 고행길과 성취감을 불러들일 것이다. 과거의 영광에 힘입어 다시금 용기를 내고 현실을 살아갈 것이다.

책을 읽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생각은 요즘 자주 든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게 정말 순례길일까?' 순례길의 끝에는 하나님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순례자에게서 산티아고 순례길 끝에는 야고보의 무덤이 있을 뿐이다. 여행자들에게는 목표달성과 성취감만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지구를 걸을 게 아니라 마음 속 가장 깊은 심연 속으로 걸어가야 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더라도 그 심연의 끝에 이르지 못하면 순례길은 단지 여행길이 되어 버린다. 설사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지 않더라도, 늘 마주하는 동네길을 걷더라도 심연의 끝에 계시는 하나님을 만난다면 그 동네길이 순례길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