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늦은 오후에 맨발걷기를 한다. 오후 5시쯤 유성 온천 계룡스파텔 황톳길에 도착해서 두 시간 걷다가 돌아온다. 그저께는 비가 내리면서 비록 얼음은 얼지 않았으나 영상 2도의 날씨임에도 발바닥이 많이 차가웠다. 집에 돌아온 후 콧물이 나서 조금 힘들었다. 다행히 따뜻하게 해서 푹 잤더니 감기까지는 가지 않았다.
어제도 같은 시간에 그곳에 도착했다. 해가 지고 있어서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한 시간 정도 걸었을 때에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나 혼자 걷는가 싶었는데 늘 나보다 조금 늦게 오는 그 사내가 보였다. 그의 나이는 60~70대로 보였고 덩치가 컸지만 걸음이 무척 느렸다. 몸이 불편해서 느린 것인지 맨발걷기 효력을 보기 위해서 일부로 천천히 걷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여튼 우리는 며칠 전부터 황톳길에서 걷지만 서로의 길을 간섭하거나 말을 섞지 않았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방해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대부분 그렇게 간섭없이 자신만의 시간을 갖지만 가끔 말을 거는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어둠 속에서 스마트폰 불빛이 비쳐지고 있는 게 보였다. 실루엣을 보니 여자 같았다. 그녀는 셀카봉에 폰을 달고 촬영을 하고 있었고 그녀 뒤로 한 사내가 함께 걷고 있었다. 두 사람이 일행이라고 생각하고 나는 그냥 지나쳤다. 그때 그녀의 모습을 봤는데 검은색 동그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고 말을 하면서 영상 촬영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어폰으로 법문을 듣고 있어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었으나 영상 촬영을 하고 있다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와 외모를 보고서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바로 위 동영상에 등장하는 여자였다.
나는 황톳길을 몇 번 오가면서 그녀를 지나쳤다. 나중에 보니 한 사내와 그녀가 계속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그 사내는 바로 내가 요즘 매일 보던 그 덩치 큰 사내였다. 좀 전에 함께 있던 사내가 이 사내였던가 싶었는데 분명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아마도 두 사람이 걷다가 만나서 대화를 하던 중에 내가 그들을 보고 일행이라고 착각을 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처음의 그는 떠났고 이번에 새로운 사내와 만나서 그녀가 대화를 하던 중이었다. 내가 그들 옆으로 지나갈 때 두 사람의 대화가 살짝 들려왔다. 맨발걷기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맨발걷기 관련한 대화 뿐이다. 맨발걷기를 하로 와서 그게 대화의 중심인 것은 알겠지만 나는 그런 대화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굳이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하는 모든 대화는 유튜브에서 보고 들을 수 있는 내용이었다.
몇 번 내가 그들을 스쳐지나가니 왠지 신경이 거슬렸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이미 어둠이 내려앉았고 사람이라곤 우리 세 사람 뿐이었다. 두 사람은 한 곳에 서서 대화를 하고 있었고 나는 계속 5분 간격으로 그들을 지나치고 있었다. 왠지 그녀가 나한테까지 말을 걸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ㅎ 영상을 보면 그녀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걸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스스로 유튜버라고 소개하며 영상을 찍는다. 그러니 당연히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게 그녀의 의무이다. 저 사내와 대화를 마치면 분명 나도 그녀의 타겟이 될 것 같았다. 이미 두 사람은 상당한 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가 사내와 10~20분 대화를 나누면 더 나눌 대화도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면 그녀에게는 다음 타겟이 필요한 것이다.
올 것이 왔다. 내가 그녀를 지나치려는 찰나 그녀는 예고도 없이 불쑥 말머리를 내게 던졌다.
"선생님, 잠깐만 이쪽으로 오세요. 추운데 그냥 걷지 말고 나무 뿌리 위에 발을 올려 보세요. 따뜻해요!"
나는 깜짝 놀라며 "네~?" 라고 말하고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다행히 그녀는 스마트폰으로 촬영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나는 내 얼굴이 영상으로 찍혀서 공개되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한번 나에게 나무 뿌리 위에 발을 올려보라고 했다. 그녀는 땅위에 올라온 큰 나무 뿌리 위에서 어린 아이처럼 발을 구르고 있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무척 난감했다. 나는 "아~ 네... 잘 알고 있습니다." 라고 짧게 말했다. 그녀는 무척 무안해하며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그녀는 내가 추울까봐 그렇게 말했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너무 직설적으로 대답했나 싶어서 미안했다. 내 발걸음은 바로 떨어지지 않고 머뭇머뭇했다. 그때 그녀가 내 빈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갑자기 맨발걷기를 해서 너무 좋다고 말을 꺼내며 대화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때 옆에 서 있던 그 사내가 "이분 유튜버인데 맨발걷기 하는 거 영상 찍어서 올린다고 합디다."라고 거들었다. 나는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유튜브에서 본 적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이곳에서 영상을 찍어서 올리셨죠?"하고 물었더니 그녀는 그렇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때부터 나는 그녀에게 잡혀서 20분 동안 대화를 이어갔다. 사람들은 맨발걷기를 하면 어디가 좋고, 당신은 어디가 아파서 걷기를 하느냐 등 주로 이런 질문들로 난리인데 나는 그런 대화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도 내가 어디 아파서 걷느냐고 물어왔는데 나는 그냥 "예방차 걷고 있습니다"하고 불필요한 질문을 차단했다. 어디가 안 좋다고 하면 그때부터 내 몸의 모든 질환을 공개해야 할 판이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간단히 대답한다. 사실 효과를 보고 있는 건 많다. 하지만 굳이 내 자잘한 문제들을 도마 위에 올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이제 3개월 걷고 있는데 너무 좋고 효과가 느껴진다고 말했다. 자기 가족은 모두 암이 있는데 유독 자신만 아직 암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더 예방 차원에서 걷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건강 문제 대신에 그녀의 영상 관련해서 대화를 이어갔다. 그녀는 혼자서 영상을 찍고 있었고, 혼자서 모든 편집까지 해서 유튜브에 올린다고 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웹에서 영상 편집하는 서비스가 있어서 웹앱을 이용하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그것이 흠이었다. 나는 독립 프로그램을 컴퓨터에 설치해서 작업하면 수월하고 빠르게 할 수 있다고 말해줬는데 자신은 컴퓨터를 몰라서 지금 하는 방식으로 밖에 할 수 없다고 했다. 내가 영상에 대해서 잘 아는 것처럼 보였는지 대뜸 나에게 "혹시 유튜버세요?"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왔다. "아니요, 오래 전부터 인터넷 관련 일을 해와서 조금 압니다."라고 말해줬다. 나는 10여년 전부터 유튜브에 영상을 올리며 사용해왔기 때문에 나름대로 조금 아는 편이다. 하지만 유튜버는 아니다.
나와 대화를 할 때에 그녀는 선글라스를 쓰지 않은 맨얼굴이었다. 어두운 밤이니 선글라스를 쓸 필요가 없었다. 어쩌면 그녀는 영상을 찍을 때만 선글라스를 쓰는지도 모르겠다. 나와 대화하기 전 영상을 찍을 때에도 어두웠으나 그때 그녀는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선글라스를 벗은 그녀의 얼굴은 분위기가 조금 달라 보였다. 영상에서는 아주 쾌활하고 적극적이고 사교적인 분위기를 풍기는데 선글라스 없는 맨얼굴의 모습은 조금 차분하면서 명랑한 성격의 소유자처럼 느껴졌다. 화장을 조금 진하게 한 듯 보였지만 피부는 고와 보였고 서구적 얼굴형의 미인이었다. 나이는 40대 초중반 정도로 보였는데 정확한 나이는 모르겠다.
대화를 마치고 장소를 옮기려는 찰나 그녀는 내 앞에서 고개를 꺄우뚱하며 옆으로 살짝 내리더니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잘 생기셨네요!" 하고 웃으며 말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나는 당황해서 "별 말씀을 다 하세요."하고 정색했다. 아마도 낮이었으면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을 내 얼굴을 그녀가 봤을 것이다. 밤이니까 내가 조금 어리고 잘나게 보이는 거지 낮이었다면 그런 말 안 나왔을 것이다. 내 나이가 이제 50대 중반이다. 그녀는 실제 내 나이로 보지 않는 듯했다.
그녀와 사내는 유성 야외 족욕탕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녀는 내게 허리를 크게 숙이면서 인사를 했고 나도 덩달아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혹시나 영상을 보고 도움될 만한 것이 있으면 댓글로 남겨 주세요." 하고 그녀가 내게 당부했다. 나는 "다음에 마주치면 그때 얘기해 드릴께요."하고 웃으며 말했다. 두 사람이 떠나고 나자 황톳길은 나 혼자 남았다. 뭔가 한차례 소나기를 피해서 겨우 정신을 차린 기분이었다. 나는 두 시간을 마저 채우고 족욕장에서 발을 씻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와 대화 중에 혹시 내가 자기 채널 구독하고 있냐고 물어왔던 게 생각났다. 나는 구독하지는 않고 그녀의 영상이 자주 떠서 안 볼 수가 없었다고 말해주었다. 집에 와서 다시 그녀의 영상을 보니 아직 구독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구독 버튼을 누르고 가장 최근의 영상에 댓글을 하나 남겼다.
"안녕하세요! 오늘 저녁에 <계룡스파텔맨발황톳길>에서 만나 잠시 대화를 나누었던 사람 입니다. 구독 안 하면 다음에 마주쳤을 때 혼날 것 같아서 구독했습니다 ^^; 늘 텐션이 업되어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시는 분 같습니다. 다른 영상을 보니 갑천도 보이고 카이스트도 보이네요. 제가 늘 거닐던 곳이어서 같은 공간을 함께 했다는 느낌이 들어서 친근했습니다. 겨울 감기 조심하시고, 인연되어 다시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 나눠요. ^^; 평안하세요!"
나는 유튜브에서 다른 사람의 영상에 댓글을 달지 않는다. 내 흔적을 아무 곳에나 남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녀의 영상이 나의 첫번째 댓글의 흔적이었을 것이다. 그녀와는 일면식이 생겼으니 그 '아무 곳'에 속하지는 않는다. 그녀는 모든 댓글에 답글 인사를 하고 있었다. 보통 유튜브 영상에 일일이 답글 달기가 쉽지 않은데 그녀는 무척 성실해 보였다. 아직 내 글에 답글은 없다. 내일 쯤 달려 있겠지. 피하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되는 사람은 피해갈 수 없나 보다. 이런 만남도 재미있다. 그녀는 계족산 황톳길에도 자주 간다고 한다. 나중에 내가 그곳을 거닐게 되면 또 만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녀가 맨발걷기 하는 장소는 두 곳인데, 두 곳 모두 나와 마주칠 확률이 높다. 사실 그녀에게서 나는 그냥 지나치는 낯선 한 사람에 불과하다. 나도 큰 의미를 두는 건 아니다. 워낙 내가 사람들과 마주치는 일이 없고, 지인과도 오랫동안 만나보지 못해서 거의 홀로 생활을 하고 있는지라 한번씩 누군가와 마주치면 재미있어 하는 편이다. 하지만 아직은 사람들과 엮이고 싶지는 않다. 지금은 홀로 지내는 시간이 더 좋고 중요하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