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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정체성

눈을 뜨면 눈앞에 사물이 보인다. 당연하다. 그러면 뒤통수 뒤로 펼쳐진 세상은 어떤가? 보이지 않으니 어둡게 보이는가, 아니면 아무것도 없는가? 아무것도 없다. 고개를 돌려서 뒤를 보지 않는 이상 내 뒤의 세상은 없다. 이 세상은 눈에 보여야 비로소 보이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보이지 않으면 사라지고 없어진다. 사라진 그 세상은 현재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눈과 세상이 서로 함께 만나야 그때에만 보이는 그대로의 세상이 나타난다. 이런 것을 잘 관찰해보면 참 신비롭다.

칸트는 물질의 근원은 인간이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눈에 보이는 세계는 인간의 정신이 만들어낸 현상계라고 말한다. 그 말은 맞다. 그것은 실제로 우리가 경험으로도 확인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을 포함해서 만물은 고유한 정체성이 없다. 예를들어서 눈앞에 사람이 있다고 하자. 얼마의 거리에서 본 사람이 그 사람일까? 거리가 멀어질수록 사람은 점점 점으로 변해가서 나중에는 형체도 없이 사라진다. 점점 가까이 다가가서 현미경으로 볼 정도가 되면 분자, 원자, 핵을 넘어서 궁극에는 파동으로 나타난다. 어느 거리에서 본 사람이 그 사람일까? 기준이 없다. 우리는 여러 방면에서 본 그 사람의 이미지를 이성으로 종합하여 상상의 그 사람을 만들어낸다. 그런 방식은 자기 자신을 규정할 때에도 똑같다. 이렇게 가변적이고 일정하지 않은 모든 존재는 존재한다고 보기도 어렵다. 오직 찰나 속에서만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