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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 - 애런

"산티아고가 어디인지는 정말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 나는 내가 '산티아고 순례자'가 아니라 '카미노의 순례자'라고 생각해. 끝나지 않은 길의 순례자."

- 《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 p.158, 김희경 지음

그녀(김희경)는 순례길에서 한 젊은 남자를 만났다. 그의 이름은 애런이었다. 그는 말레이시아에서 태어났고, 캐나다에서 자랐으며, 직장은 미국에서 다녔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했다. 카미노를 걷는 것도 그런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내가 카미노에서 원하는 건 행복을 가로막는 마음속 장벽을 제거하는 거야."라고 그는 말한다.

그녀는 애런과 나눈 얘기를 상세하게 기록한다. 순례하는 동안 헤어지기도 하고 다음 마을에서 만나기도 하면서 그렇게 두 사람은 친분을 이어간다.

위의 글은 애런이 그녀에게 한 말이다. 무척 마음에 든다. 자신은 산티아고의 순례자가 아니라 카미노의 순례자라고 한다. 끝나지 않은 길의 순례자. 순례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그 마음에 신을 향한 마음, 진리를 찾으려는 열망, 참된 자신을 찾으려는 간절함이 있다면 모든 발걸음이 순례자의 길이다. 나도 갑천 습지길을 걸으면서 늘 순례자라고 생각한다. 내 발걸음에 하나님의 흔적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은 내가 지금까지 읽은 산티아고 여행기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책 같다. 책을 구성하는 방식도 조금 독특하고 이야기를 이어가는 재주도 남다르다. 여행 전문 작가들보다 더 재미있게 글을 쓴다. 더군다나 저자인 김희경씨는 고등학생 때 내가 좋아했던, 나보다 두 살 적은 고향 교회의 그녀를 떠올리게 했다. 저자의 모습과 글에서 보여지는 독특함에서 옛날의 향취를 떠올리게 한다. 나는 그녀를 좋아했지만, 정작 그녀는 내 친구를 좋아해서 나는 한번도 고백하지 못하고 가슴앓이만 했었다. 하지만 우리는 참 많이 친했고 편지도 많이 주고 받았다. 그때는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 시절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그녀를 처음 알았고, 고2 때까지 다른 친구들과 함께 참 친하게 지냈다. 시간이 흘러서 20대 중반에 경북대학교 도서관에서 매일 공부한 때가 있었다.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고 9급 공무원 준비를 하느라 그녀 역시 도서관을 찾았다. 어느 날 점심 시간이 되자 그녀가 나를 찾아왔다. 혼자서 공부하다보니 함께 식사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집이 가까이 있어서 늘 집에서 밥을 먹었는데 그날부터 그녀와 함께 학교 밖 식당에서 먹게 되었다. 그녀는 참 예뻤다. 성격도 차분하면서도 조신해서 남자들이 함부로 근접하지 못했다. 도서관 분위기를 살펴보니 주변 남자들이 그녀에게 눈독을 들이고서 그녀에게 메모와 간식을 자리에 두고 가는 것 같았다. '내가 너한테 관심이 있으니 이것 먹고 내 마음을 알아달라!', '내가 너한테 꽂혔으니 나와 사길까?' 뭐 그런 내용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들은 그녀를 잘못 판단했다. 그런 싱거운 호이(好餌)에 휘둘릴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에게 나는 가까운 교회 오빠이니 나와 식사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모르는 주변 남자들은 마치 내가 그녀의 남자 친구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녀의 학과 선배들도 내가 애인인 줄 알아서 그들에게 나와의 관계를 설명하느라 애먹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내가 나타난 후로는 더 이상 남자들이 찝쩍거리지 않더라고 말했다. 점심 시간이 되면 멀리 떨어져 앉던 우리는 입구에서 만나 웃으며 걸어나갔다. 그 모습을 질투하는 남자들이 머리 뒤로 그려져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하여튼 그때부터 한두 달 정도 거의 매일 함께 식사하고 교정을 걸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때 나는 '예전에 너를 좋아했었다'고 말해주기도 했다. 그녀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이 들었다. 그녀도 좋아하는 남자가 있다고 말했다. 학교 선배인데 서클에서 만났다고 했다. 그 당시에는 싸웠는지 잠시 이별 상태라고 말한 것 같다. 5~6년 지나서 그녀가 결혼을 했는데 아마도 그때 말한 그 선배가 아니었나 싶다. 그녀와 가깝게 지낸 것은 어릴 때와 도서관에서의 그때가 전부였다. 20대 초에는 어릴 때의 그녀로 인해서 많은 환상을 갖고 있었다는 것도 알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20대 초반까지 좋아했지만, 실제로 도서관에서 대화를 하며 지내보니 사랑스러운 여자임에도 나에게는 분위기나 코드가 맞지 않은 듯했다. 언제부터 우리 사이에 내면의 강이 깊게 생겼는지 알지 못한다. 처음부터 그랬는지, 아니면 20살 전후로 그러했는지 알 수 없다. 그 후로는 그녀에 대한 어릴 때의 감정이 정리되고 단지 후배로서 좋은 이미지만 갖게 되었다. 고등학생 때 그녀와도 편지를 많이 주고받았는데 아직도 갖고 있다. 그때 편지를 읽어보면 어린 그녀가 그런 내용의 편지를 썼다는 게 참 신기할 정도로 똘똘했다. 그녀가 결혼 후 아이가 초등학교를 다닐 정도로 자랐을 때 우연히 SNS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그녀는 무척 놀라워했다. 그녀는 여느 주부들처럼 온통 아이들 키우고 교육시키는데에만 마음이 가 있었다. 자기 인생은 보이지 않았다. 반가우면서도 소시민적 삶을 사는 그녀가 조금 안스러웠다. 그렇다고 특별히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어릴 때의 그 똘똘했던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은 듯했다. 잠시 그렇게 인사하고 안부를 묻다가 내가 그녀의 계정에 방문하지 않아서인지 또 잊혀졌다.

저자인 김희경씨는 나와 비슷한 세대인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나보다 한두 살 적은 것 같기도 하다. 다 큰 어른에게서 어릴 때의 그녀를 떠올리다니 참 재미있다.